장소는 단지 ‘공간’이 아니라, 축제의 생존 조건이다
축제를 기획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던져지는 질문은 “어디서 할 것인가?”이다. 대부분 이 질문은 넓고, 사람들이 잘 모이고, 접근성이 좋은 장소를 기준으로 판단된다. 행정기관은 도심 광장, 공원, 하천변, 체육시설 등을 제안하고, 기획자는 관람객 동선을 효율적으로 설계할 수 있는지, 부스 배치가 용이한지를 따진다. 하지만 이제 이 질문은 더 복잡해져야 한다. 기후위기 시대, 축제의 장소는 단지 ‘많은 인파를 수용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극단적 기후 변화 속에서도 안전하게 지속 가능한가’를 따져야 하는 시점에 이르렀다.
예전에는 예외적으로 간주되던 폭염, 폭우, 강풍, 산불, 열섬현상이 이제는 거의 매년 반복되는 일이 되었고, 특정 지역의 특정 시즌은 이미 ‘축제 금지 구역’에 가까운 기후 조건을 갖추고 있다. 서울의 한 여름밤 축제는 2023년 집중호우로 행사가 전면 취소되었고, 강원도의 유명 겨울 빙어축제는 얼음이 얼지 않아 2년 연속 중단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점점 더 보편화될 것이다. 그럴수록 축제를 어디서 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단지 장소를 빌리는 문제가 아니라, 위기 상황 속에서 사람과 시스템이 어떻게 작동할 수 있는가에 대한 총체적 설계의 문제가 된다.
이제 축제 장소 선정은 단지 넓은지, 예쁜지, 인구가 몰리는지만이 아니라, 온도는 어떤가, 수해 가능성은 없는가, 재난 시 대피 동선은 확보되는가, 재생에너지는 가능한가, 주민 접근성과 이동 수단은 무엇인가 같은 질문을 반드시 포함해야 한다. 이 글에서는 기후위기 시대에 축제 장소를 어떻게 선정해야 하는지를 기존의 기준과 비교하며 제안한다. 동시에, 단지 ‘회피’하는 방식이 아니라, 축제 장소를 통해 어떻게 새로운 문화적 상상과 공공성을 구현할 수 있는지도 살펴보고자 한다.
‘접근성’ 중심의 장소 선정은 탄소 배출과 위험을 키운다
기존의 축제 장소 선정에서 가장 중요한 기준 중 하나는 '접근성'이다. 이는 대개 차량 접근이 쉬운 도심지, 넓은 주차장 보유 여부, 지하철이나 버스 노선 밀집 지역과의 거리 등 물리적 접근 가능성을 뜻한다. 그러나 이 같은 기준은 의도치 않게 기후위기 시대에 부적절한 결과를 낳고 있다. 첫째, 차량 중심의 이동을 전제로 하면 관람객 대부분이 자가용으로 축제장을 찾게 되고, 이는 해당 축제의 전체 탄소 배출량 중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교통 유발 배출’을 증가시킨다. 실제로 서울시 한강변 여름 축제의 사례를 보면, 축제장 내 전력 소비보다 방문객 차량 이동에서 발생하는 탄소량이 약 1.8배 더 많았다.
둘째, 차량 접근이 용이한 개활지나 도심 중심지는 열섬 현상이 심하고, 콘크리트 지표면으로 인해 복사열이 급격히 상승한다. 이로 인해 여름철 축제 시 실측된 지표면 온도가 42℃를 넘는 구간도 있었다. 이는 온열질환 발생 가능성을 높이고, 쿨링존과 응급 의료 시스템에 추가 비용을 유발한다. 단지 '오기가 편한 곳'이라는 이유로 장소를 선택했지만, 실제로는 '버티기 어려운 장소'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제는 접근성보다는 저탄소 이동 구조를 유도할 수 있는 대중교통 연계성, 도보 동선, 마을 순환형 버스 활용 가능성 등을 중심으로 장소를 설계해야 한다. 또한 행사장 인근 주거 밀집 지역과의 거리, 자전거 접근성, 장애인 이동 경로 등의 접근성도 함께 고려해야 하며, 단순한 물리적 거리보다 ‘생태적 접근성’을 기준으로 삼는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
기후위기 대응 장소의 핵심은 ‘자연 기반 회복력’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좋은 장소'를 넓고 인공적인 구조물로 가득한 공간으로 이해해왔다. 넓은 광장, 대형 무대 설치가 가능한 공터, 정비된 주차장을 갖춘 복합문화시설 같은 곳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기후위기 시대의 ‘좋은 장소’는 그것과 정반대일 수 있다. 진짜 중요한 건 자연 기반의 회복력, 즉 그 공간이 스스로 기후의 영향을 완화하거나 대응할 수 있는 물리적·생태적 조건을 갖추고 있느냐다.
숲이나 강변, 자연 그늘이 풍부한 공간은 폭염을 견디는 데 탁월한 구조를 제공한다. 바람길이 열려 있는 산책로, 지면이 식물로 덮인 공터는 열섬현상을 줄이고, 체감온도를 3~5℃ 낮춰주는 효과가 있다. 반면, 콘크리트 바닥이나 유리 건물 사이 공간은 바람이 통하지 않고 열을 가두어 사람의 체온 조절 기능에 부담을 준다. 따라서 장소 선정 시 단순히 평평한 땅이 아니라, 기온 조절, 음영 확보, 빗물 배수, 강풍 차단, 비상 시 대피로 등 기후 탄력성 요소를 갖춘 공간이 우선되어야 한다.
서울 도봉구는 최근 여름 야외축제를 기존 도심 광장에서 인근 도봉산 자락의 숲길로 변경했다. 장소 이동만으로도 쿨링존 설치 비용을 거의 줄일 수 있었고, 자연 음영이 주는 쾌적함과 조용한 분위기로 축제 만족도가 오히려 높아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즉, 기후위기 시대에는 자연을 거스르기보다, 자연을 적극적으로 설계 요소로 끌어들인 장소가 생존 가능한 축제를 만들어낸다.
대피 가능성과 재난 대응 시스템은 필수가 되어야 한다
기후위기와 연계된 극한기상은 이제 축제 현장의 필연적인 변수다. 하지만 많은 축제 장소는 여전히 재난 발생 시 대피 동선이 없거나, 가까운 실내 공간과 연결되어 있지 않다. 집중호우나 낙뢰, 태풍이 예상될 경우, 수천 명의 관람객을 단 10분 안에 안전한 공간으로 유도할 수 있는 시스템은 거의 갖춰져 있지 않다.
따라서 축제 장소는 반드시 주변에 체육관, 공공도서관, 주민센터, 학교 등 실내 구조물과 연결 가능한 공간인지 확인해야 한다. 무대 중심의 집중형 동선 구조가 아닌, 분산형 순환 구조를 적용하고, 참가자가 자율적으로 이동할 수 있는 표지판, 안내 인력, 이동 안내 앱 등을 통합적으로 설계해야 한다. 이는 단지 안전 문제를 넘어서, 위기 발생 시 공동체 회복력을 키우는 훈련장으로서의 축제 역할을 가능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전남 해남의 바닷가 축제는 폭우로 매년 피해를 입었지만, 2023년부터 장소를 해변에서 마을 체육공원과 인근 초등학교 운동장으로 분산시키고, ‘우천 시 자동 대피 시나리오’와 SMS 시스템을 도입해 문제를 최소화했다. 이것은 장소 선정 하나로, 기후위기의 충격을 줄이는 구조적 대응이 가능하다는 증거다.
장소를 다시 생각하라, 축제는 ‘살아남는 공간’에서 시작된다
기후위기 시대, 축제의 장소는 단지 무대를 설치하고 사람을 모으는 공간이 아니다. 그 장소는 사람들이 함께 머물 수 있는가, 재난 속에서도 지켜낼 수 있는가, 환경을 파괴하지 않고 오히려 회복을 도울 수 있는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야 한다. 넓고 접근성이 좋은 곳이 아니라, 기후에 순응하고, 지역성과 생태적 감각을 품은 공간이야말로 지속 가능한 축제 장소다.
앞으로 우리는 장소를 고를 때마다 물어야 한다.
이곳은 열에 약하지 않은가?
폭우가 왔을 때, 어디로 대피할 수 있는가?
이동 수단은 무엇이고, 차량보다 나은 대안은 있는가?
무대를 만들지 않고도 예술이 가능한가?
축제가 끝난 후에도 이 공간은 지역에 남는가?
그 질문에 ‘예’라고 답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기후위기를 이기는 장소를 선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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