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는 '특별한 날의 행사'가 아니다
이제 ‘재난’은 일상이 되었다. 기후위기가 본격화되면서, 한국의 여름은 폭염과 국지성 호우, 태풍이 교차하는 재난의 계절이 되었고, 겨울은 눈 대신 미세먼지와 이상고온이 반복되는 불확실성의 시기가 되었다. 이런 시대에 지역축제는 단지 특별한 이벤트로 머무를 수 없다. 오히려 수많은 인파가 동시에 모이는 대규모 공간에서, 안전하고 질서 있게 기후 재난에 대응하는 능력을 테스트하고 훈련하는 공공 실험장이 되어야 한다.
축제는 원래 사람을 모으는 일이다. 그러나 기후위기 시대의 축제는 ‘어떻게 모으느냐’보다 ‘어떻게 흩어질 수 있느냐’를 함께 고민해야 한다. 위기 속에서도 공공성을 지키고, 지역 공동체의 회복력을 점검하는 계기. 이 글은 그런 축제의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 탐구한다.
축제 현장이 ‘재난 훈련장’이 될 수 있는 이유
우선, 축제는 ‘인구 밀집’과 ‘복잡한 동선’, ‘다양한 위험 요소’가 함께 작동하는 일시적 공공공간이다. 이 특성은 재난 대응 훈련과 유사하다. 수천 명이 몰리는 야외 행사장에서의 열사병, 미끄럼 사고, 강풍으로 인한 시설물 붕괴 등은 기후 재난의 축소판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축제는 실제 재난을 ‘예상하고, 실전처럼 훈련하며, 대응 매뉴얼을 테스트해볼 수 있는 최적의 공공장치’가 된다. 예를 들어 축제 기간 중 비상 대피 안내 시스템을 실제로 작동시켜보고, 시민이 직접 대피 훈련을 체험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한다면 이는 그 자체로 지역사회 재난 대응력 강화에 기여할 수 있다.
또한 축제에는 고령자, 유아, 장애인 등 다양한 기후 취약계층이 참여한다. 이들이 위기 상황에서 어떻게 보호받고, 어떤 경로로 이동해야 하는지를 현장에서 실제 점검하고 학습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가 축제인 셈이다.
실제 적용 가능한 기획 전략과 국내외 사례
이러한 기능을 실제로 구현하려면 축제를 ‘즐거움의 공간’에서 ‘배움과 준비의 공간’으로 설계하는 관점 전환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서울시의 일부 축제에서는 열지도 기반 ‘쿨링존 시뮬레이션’, 비상시 대피로 표시 체험, 스마트폰 비상알림 앱 사용 교육 부스 등이 함께 운영되며 재난 대응과 디지털 역량 교육을 결합한 콘텐츠를 선보였다.
해외에서는 일본의 ‘재해 대응형 축제(防災フェスティバル)’ 모델이 눈길을 끈다. 이 축제는 방재 교육을 위한 놀이형 콘텐츠, 재난 식품 체험, 위기 상황 행동 시뮬레이션 등을 결합해 축제 전체가 하나의 훈련장이자 문화행사로 작동하게 만들었다. 이 모델은 지역 주민의 재난 대응력을 자연스럽게 향상시키고, 재난 대응 체계를 실제 시민 참여 속에서 점검할 수 있는 효과를 얻었다.
국내에서도 몇몇 지자체는 축제 전후에 안전체험부스, 응급처치 워크숍, 지역 소방서 연계 모의 대피 시나리오를 포함시키는 시도를 시작하고 있다. 이는 단순히 위기대응을 알리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반복적으로 훈련하고 습관화할 수 있게 하는 구조 설계다.
재난 시대, 축제를 위한 행정 시스템은 어떻게 바뀌어야 할까?
그러나 이러한 재난 대응형 축제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지자체와 축제 행정 시스템 자체가 구조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현재 대부분의 축제 예산과 인력은 콘텐츠 기획, 홍보, 운영에 집중돼 있고, 안전과 대응은 외주 경비나 간이 매뉴얼에 의존하는 수준이다.
이제는 축제 기획 단계에서부터 재난 전문가, 공공 보건 인력, 안전 설계 컨설턴트가 공동 참여하는 체계를 의무화할 필요가 있다. 또한 축제 운영 예산 내 기후 리스크 대응, 응급 장비, 쿨링존·쉼터·대피안내 시스템 구축 비용을 독립 항목으로 편성하고, 운영 리허설을 예산 지원의 전제로 삼는 행정 기준도 검토해야 한다.
축제를 하나의 재난 대응 훈련장으로 바라본다면, 우리는 축제를 통해 단지 문화를 나누는 것뿐 아니라, 함께 살아남는 방법을 실습하는 문화적 안전망을 구축할 수 있다.
즐기는 것과 대비하는 것은 동시에 가능하다
재난이 일상이 된 시대, 축제는 지역의 ‘취약한 순간’이 될 수도 있지만, 잘 설계된다면 가장 강력한 훈련장이 될 수도 있다. 기후위기 앞에서 우리는 두려움이 아닌 준비로, 혼란이 아닌 구조로 대응해야 한다. 축제는 그 훈련을 자연스럽고도 공동체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특별한 기회다.
이제 우리는 묻지 말아야 한다. “이 축제, 안전한가요?”가 아니라, “이 축제, 지역을 안전하게 만드는가?”
그 질문에 제대로 답할 수 있을 때, 축제는 진정한 생존 전략이 될 수 있다.
축제는 단지 ‘행동 매뉴얼’이 아니라 ‘의사소통과 회복의 장’이 되어야 한다
축제가 단순한 훈련장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절차적 매뉴얼’만으로는 부족하다. 진짜 위기 상황에서 사람들의 생명을 지키는 건 매뉴얼보다 즉각적인 의사소통과 공동체 간 신뢰다. 따라서 축제를 통해 재난 상황 속에서도 연결되고 협력하는 훈련, 다시 말해 의사소통 회복력의 실험장으로 축제를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일부 축제는 참가자 대상 긴급 커뮤니케이션 시뮬레이션 실험을 도입했다. 갑작스럽게 비가 내리는 상황을 가정하고, 스피커·앱·현장 진행요원을 통해 안내 메시지가 얼마나 신속하게 전달되는지, 참가자들이 혼란 없이 이동하는지를 모니터링하는 시스템이다. 이 실험은 단순히 방송만이 아니라, 현장 자원봉사자, 스태프, 시민 사이의 '정보 순환 경로'가 얼마나 효과적으로 작동하는지를 평가하는 데 집중한다.
특히 축제 현장에는 외국인, 노인, 청소년, 장애인 등 다양한 소통 채널이 필요한 사람들이 함께 존재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시뮬레이션은 다문화·다세대·취약계층 대응력까지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이는 지자체가 예산만 투입해서는 알 수 없는, 현장의 실질적인 재난 커뮤니케이션 역량을 진단하는 살아있는 현장 실험이다.
축제는 지역민의 ‘심리적 회복력’을 기르는 문화적 도구가 될 수 있다
기후위기와 재난은 단지 물리적 피해만 남기지 않는다. 실직, 생계 불안, 삶의 터전 붕괴는 개인의 정신 건강과 공동체의 심리적 회복력을 심각하게 훼손한다. 하지만 이런 감정은 통계로 측정되기 어렵고, 행정의 영역에서도 종종 간과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지역축제가 공감과 위로, 재연결의 공간으로서 핵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강원도 고성군에서는 산불 이후, 이재민을 대상으로 ‘함께 걷는 마을 음악회’라는 소규모 문화축제를 운영했다. 그 축제는 어떤 큰 공연도 없이, 단지 주민이 서로 손을 잡고 불탄 숲 근처를 걷고,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나누며, 작은 노래를 부르는 구조였다. 하지만 이 축제는 참여자들에게 그 어떤 복구 보조금보다도 강한 ‘감정적 회복’과 소속감을 제공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집단 회복의 리추얼’이라고 부른다. 지역축제가 단지 즐거운 행사가 아니라, 지역민이 재난 이후 감정을 나누고 재구성하는 의식의 장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구조를 갖춘 축제는 앞으로 더욱 중요해진다. 기후위기가 장기화될수록, 지역은 단지 재해에 대응하는 것을 넘어서 회복하고 다시 살아가는 방법을 문화적으로 함께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참여형 축제로서의 재난 문화 훈련 – 공동체 중심의 생존 전략
지역축제가 위기 대응 훈련장이 되려면, 무엇보다도 주민이 관람객이 아닌, 실행 주체로서 참여하는 구조가 필수적이다. 축제는 행정이 보여주는 쇼가 아니라, 지역 공동체가 함께 만들고 운영하는 참여형 구조일 때, 진짜 생존력 있는 훈련장으로 작동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제주도의 한 마을축제는 ‘재난을 이겨낸 마을의 이야기’를 주민 배우들이 연극으로 재구성하여 무대에 올리는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관람객은 없고, 모든 마을 주민이 배우, 조명, 무대 설치, 해설자로 참여한다. 그 연극은 단지 과거의 피해를 회상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마을이 서로를 도우며 살아남았는지를 ‘다시 몸으로 기억하는 공동 실습’이었다.
또한 일부 축제는 지역 자율방재단, 청년기획단, 마을 어르신 자치회와 함께 ‘가상의 태풍 대응 시나리오’를 만들고 축제 중 실습하는 구조를 실험하고 있다. 참가자는 각자 역할을 부여받아, 축제장 내에서 재난 발생 후 자원을 어떻게 분배할지, 취약계층은 누구이며 어디로 안내해야 하는지, 대피소는 어디인지를 실제로 움직이며 체험한다. 이 구조는 단순 재난 대비 훈련을 축제 콘텐츠로 전환하는 방식이자, 지역민이 스스로 위기 속에서의 역할을 익히는 훈련이다.
이러한 기획은 축제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보여준다. 문화는 단지 아름다움을 나누는 도구가 아니라, 위기에서 함께 살아남기 위해 협동하는 방식 그 자체가 될 수 있다.
마무리 제안: 축제는 '재난 이후'가 아니라 '재난 중'에 필요한 문화다
많은 사람이 축제를 위기 이후의 회복 단계에서만 상상하지만, 이제 축제는 위기 ‘중간’에도 작동할 수 있는 공공도구로 변화해야 한다. 실제로는 기후 재난이 오기 전에, 혹은 재난 속에서 축제가 열리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우리는 더 이상 '안전하게 열리는 축제'만을 목표로 하지 말고, ‘축제가 안전을 만들어내는가’를 고민해야 한다.
기후위기는 앞으로도 반복된다. 폭염도, 태풍도, 집중호우도 이전보다 더 자주, 더 심하게 올 것이다. 지역축제는 그 안에서 문화와 안전, 공동체 회복력을 연결하는 유일한 플랫폼이 될 수 있다. 이제는 즐겁고 화려한 것만이 좋은 축제가 아니다. 살아남는 방식, 함께 훈련하는 방식, 기억을 나누는 방식을 설계할 수 있을 때, 축제는 진짜 의미 있는 생존 전략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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